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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는 '고수'가 아닌, '무수(無手)'였다.txt 조회 : 7084
스톡king (211.211.***.217) 작성글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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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급 장군
2016/03/11 21:31
 
이것은 사건이다. 바둑사, 아니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길이 남을 사건이다. 인간이 만든 최고 차원의 두뇌 게임인 바둑에서 인간이 인공지능에 내리 두 판을 졌다. 이것은 오락실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져버리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두 번째 대국에서는 특별히 잘못 둔 것도 없는데 졌다. 그것도 불계패로. 프로바둑 세계에서 2연속 불계패는 일종의 ‘치욕’으로 받아들여진다. 요즘 인기 있는 종합격투기로 따지자면 같은 상대에게 두 번이나 연속으로 서브미션이나 TKO로 진 것과 같다. 나머지 세 판이 남아있다고는 하지만 이긴다는 보장도 없는데다 설사 모두 이긴다 해도 인공지능에 온전히 승리했다고 할 수는 없게 됐다.

인간 이세돌, 한국인 이세돌에게 한껏 감정이입을 하자니 무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대국 이전, 그러니까 엊그제까지 ‘어떻게 감히 컴퓨터가 인간의 영역에..’라며 가졌던 우월감은 오만이었다. 인간 대 기계라는 단순한 대결 구도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많이 심란하다. ‘인간의 피조물’이 ‘신(혹은 자연)의 피조물’을 이긴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


두 차례 대국을 살펴보면 알파고에겐 약점이 없어 보인다. 이세돌은 두 번째 대국이 끝난 뒤 “(바둑을 두는 동안) 한 순간도 알파고에 앞선 적이 없었다”며 "나의 완패"라고 했다. 실제로 그랬다. 포석부터 돌을 던질 때까지 이세돌은 줄곧 열세였다. 인공지능은 '정석'에 충실한 바둑을 둘 것이란 예상은 처음부터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알파고는 예측을 벗어난 '신수(新手)'들을 뒀다. 그런 수들의 진의를 재빨리 알아채고 대응하기란 쉽지 않다. 대중의 이해를 돕고자 편의상 이런 수들을 '변칙수'라 부르는데, 순전히 인간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바둑 해설가들은 이 수들을 두고 "프로기사라면 두지 않는 수" 혹은 "바둑 연습생이 이렇게 뒀다면 선생님에게 혼찌검이 날 수"라고 했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관점에서는 이기는 수였다. 결과가 그것을 말해준다.

마치 알파고는 딱 이길 만큼만 두는 것 같았다. 김성룡 9단은 "알파고는 본인이 이기는 상황에서 뻔한 실수를 해준다. 그런데 엉뚱한 실수마저도 안전하게 이기기 위한 계산이었다"고 놀라워 했다. 알파고는 이세돌의 공격을 순순히 받아주면서 다른 실리를 취하는 일종의 '사석(死石)작전'을 구사하기도 했다. 이세돌이 우상귀를 침입했을 때 자신의 집을 내주는 대신 중앙의 요석들을 차지했던 것이다. 이것은 정확한 형세 판단이 있어야 가능한 전략이다. 큰 것을 떼어 주고 작은 것만 먹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두 차례 대국에서 알파고는 '무수(無手)'의 면모마저 보여줬다. 하수(下手)는 고수(高手)를 무서워 하고, 고수는 무수를 두려워 한다. 왜냐하면 읽어낼 수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속내를 알 수 없는 것, '왜'라는 게 없는 것이다. "왜 거기에 두었니"라고 묻는데 "그냥"이라고 말하는 격이니 속된 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인 것이다.

결과론이지만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대결이었는지 모른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바둑만큼은 인간, 그 가운데에서도 동양인의 영역이라고 확신했는데 이제 그 확신은 확실하지 않다. 이쯤되면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바둑 10단 알파고를.

돌이켜보면 '특별히 잘못 둔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 자체가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은 아니었을까. 인간의 눈으로는 분명 적절한 수였지만 알파고의 시각에서는 악수(惡手)로 보였던 건 아닐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머리가 복잡해진다. 하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이세돌의 역전승을 기대하며 부지런히 응원하는 길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머니투데이 이승형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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