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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치킨 게임.ssul 조회 : 251
스톡king (72.226.***.201) 작성글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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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4 01:23
 

2016년 8월 4일



내게 졸업장(학위)이 큰 기득권이 되지 못 한다고 자각한 계기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가치관의 변화는 내 인생에 (좋은 방향으로)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2007년4월 박사학위 취득후에 첫 직장이던 LG화학을 떠나서 삼성반도체로 이직을 했다.

당시에 삼성인사팀에서 매우 좋은 조건을 제시했고, 이 모든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카이스트 졸업장과 조지아텍 박사학위 덕분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내딴에 어릴때 부터 치열하게 공부해서 딴 학위들이라, 과학고 시절부터 (비록 과학고내에서 등수가 매우 별로 였지만) 몸에 찌들어 있는 선민의식과 우월감은 하늘을 찔렀다고 고백한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어린 나이에 당시 왠만한 대학들… 그냥 수능 대충치면 가는 커트라인이고 너무 우습게 보였던 시절이다. 


강북 변두리 (광진구 중곡동) 출신인 내가 그랬으니, 강남 8학군 출신들 친구들의 인식이 어땠을지 안봐도 뻔하고. 서울에서 2등하는 한성과학고 출신인 내가 그랬으니, 서울과학고 출신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도 뻔하다. 카이스트 진학후에도 그런 부류의 친구들이 모였으니 이런 우월감은 시너지를 낸다.


그런데, 삼성반도체 이직후에 몇일 지나지 않아서 배치된 팀의 잘나가는 S모 책임님이 차한잔 하자고 나를 불렀다. 

서울대 학부 - KAIST 석박사 출신에 일잘한다고 칭찬이 자자하던 분이라 내심 KAIST 학연으로 나를 챙겨주나 싶어서 기대가 컸다. 


둘만 앉아 있는 회의실에서 예상 밖의 얘기를 들었다.

‘인사팀에서 최책임을 왜 뽑았을 것 같아요? 무슨 기대를 할 것 같아요?’

(내가 잘나서. 미래 기술을 개발하는 어쩌구 저쩌구 그게 내 생각이었고, 나름 겸손을 떨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아니요. 그냥 인사팀 실적 때문에 그래요.’ 

‘일해보면 알겠지만, 딱히 정해진 것 없고. 최책임 전공이랑 잘 맞는 일도 찾기 힘들거에요.’ 

‘알아서 잘 찾아봐요. 쉽지 않겠지만…'


아… 뭐 이딴 얘기가 있나? 이 인간이 지금 굴러들어 온 돌이라고 텃새를 부리나? 

내가 벌써 경쟁자 인거야? 그런 생각에 화가났다. 

그런데, 이후에 당시 S책임의 말이 매우 적절한 조언이었고. 사실이라는 걸 뼈져리게 느꼈다.


삼성반도체 입사후 2007년 연말, 그러니까 거의 8개월 동안 내 자존심은 끝도 없이 추락했고. 대체 내가 뭐하는 인간인가? 라는 자괴감에 치를 떨었다. 

뭘 알아야 하지? 아이디어? 그런거 없었다. 뭣도 모르고 이직을 했는데, 누가 나에게 밥상을 차려서 가져다 주는 사람도 없었고 그냥 일에 던져졌는데. 

딱히 뭘 해야할지. 일이 없었다. 내가 이렇게 월급 받아도 되는가? 보너스 받아도 되는가? 심각하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사실 반도체 같은 분야는 왠만한 대학 실험실에서 전공으로 디립다 파다와도 회사쪽에서의 기술이나 시스템이 워낙 앞서 있다보니, 입사해서 보는 것들이 모두 별천지이다. 대당 6000만불이 넘는 Stepper로 Fabrication한 미세공정을 학교에서 경험해볼 기회가 없다.


개인적으로 제일 속상했던 것은, 그래도 두 딸아이를 둔 집안의 가장인데, 멍하니 일하는 척 하다가 회의 몇개 들어가고 집에 돌아가면.

당시 유치원생인 첫째 아이가 반갑게 맞아 줬다. 현관문에서 ‘아빠 회사 다녀왔다.’라고 말하면서 집에 들어갈 때, 울컥 했던적이 몇번 있었다. 

내 속으로는 ‘아빠 회사에서 멍하니 있다가 왔다.’고 되뇌였다. 

와이프에게도 말하지 않았었지만, 덜컥 이직하고 보니 내 처지가 너무 참담했다.


당신이 보기에도 한심했는지, 지금은 임원이 되신 당시 왕그룹장님이 내게 하신 말씀이 있었다.

‘최박아. 니 뭐 할지 모르겠으면 현장에나 가봐라. 라인(FAB)들어가서 가만히 봐라. 뭐 개선할 거 있나? 공정은 어떤가? 어떻게 일하나?’

기껏 뽑아 놓고 하신다는 말씀이 이렇게 무책임한 얘기다. (그때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라인에 들어가지 않고 책상 머리에서 좀 어려운 전공용어 섞어가며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어차피 남는 시간과 딱히 날 찾는 사람도 없을 때, 아무 생각없이 방진복을 입고 라인에 들어갔다.


어떤 날은 하루종일 라인 천장을 분주히 움직이는 AMHS (Automated Material Handling System)를 따라 다닌적도 있었고, 

어떤 날은 Photo 공정 Bay에서 엔지니어들과 오퍼레이터들이 뭐하나 뚫어지게 관찰한 날도 있었다. Reticle 들고 옮기는 심부름도 종종했다.

어깨 너머로 공정 데이터가 올라오는 것도 한참 보고. 나중에 자리에와서 DB에서 그 데이터 왕창 뽑아서 혼자 들여다 봤다.

온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Diffusion Furnace 설비들 몰려 광활한 지역을 계속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좀 돌아다니면, 방진복이 땀에 쩔어서 다이어트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다. 운동이나 해야지…ㅋㅋㅋ)


그 안에서는 내가 그냥 nobody 였는데, 안면을 좀 트게된 엔지니어들에게 띄엄띄엄 질문을 했고. 

더 궁금한게 있어서, 오퍼레이터들에게가서 (주로 고졸 여사원들) 물어 보면. ‘이 아저씨 초짜야? 바빠 죽겠는데 뭐 이런걸 물어봐.’라며 짜증섞인 대답을 듣기 일수였다. 


그렇게 지나간 몇개월 동안 나는 참 많은 것을 배웠다. (뭘 배울 거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었지만.)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장 오퍼레이터들과 엔지니어들을 절대 무시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들의 학력과는 무관하게 이 사람들이 회사를 먹여살리고 몇조 단위 이익을 내는 핵심에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내가 받는 급여와 보너스는 오롯이 이 사람들의 기여에 의한 것이었고, 그때까지 나는 그냥 무임승차한 ‘똥박’에 불과 했다.


2007년 말쯤에 몇개월 라인에서 방진북 입고 보낸 시간 덕에, 나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했고 당시 몇몇 대졸 엔지니어들과 같이 일할 기회를 얻었다.

이들의 출신학교? 인사 파일을 뒤져보지도 않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 친구들이 나보다 이회사에서는 선배이고, 나보다 더 많이 아는 것들도 있었다. 

그때 같이 일했던 친구들이 지금도 일 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들중에 소위 말하는 SKY출신 하나도 없다. 요즘 시끄러운 모 여대 출신도 하나도 없다. 


이후에 같이 일하게된 ‘좋은 학교’ 출신들 보다 이들은 훨씬 일을 잘했다. 

특히 나중에 들어 온 카이스트 출신 후배가 우리팀에 들어와서, 학교 거들먹 거리며 현장 오퍼레이터와 엔지니어들에게 오만방자하게 행동할 때. 내가 가장 harsh하게 그 친구를 대했었다.

지금 일하는 직장은 더욱 그렇다. 쟁쟁한 학교 출신들, 박사들 넘쳐난다. 

근데 그것 자체로는 아무 의미 없다.



2017년 5월 30일


반도체 치킨 게임,


*2007년 ~ 2009년 당시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의 일개 엔지니어로서 겪은 한 단면을 적었습니다.

*당시에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들, 이후에 이해된 부분이 많습니다. 

*회사 전체적으로 어떤 노력들이 있었는지, 전체 흐름이 어땠는지 제 시야가 좁아서 한정적일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숫자와 기술적인 내용들의 기술을 피했습니다. (10년이 지났지만, 그 자체가 기밀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진정 그때를 경험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동료,선후배, 기라성 같은 임원분들 항상 존경합니다.



2007년 이전 회사에서 삼성전자에 이직할 당시에 인사팀에서 하던 말이 ‘메모리는 최근 5년간 항상 30% 이상 PS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걸 연봉에 카운트 해도 된다는 얘기였고. 당시에 직장인으로서 돈을 모으는게 절박했던 내게는 급여를 많이 준다는 회사로 옮기면서 기대가 컸다. 

(내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해서 기여할지는 크게 생각하지 못했었다.)


2007년 3월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로 이직을 한 후, 윗 글처럼. 맨땅에 헤딩을 하며 일을 배워가던 중. 

여러 라인에 많은 현장직 엔지니어와 생산담당하시는 분들을 알게 되었다.

2007년 겨울 여느때 처럼 야근 하던 중, XX라인 (당시 최신 12인치 FAB) 옆 흡연장에서 그 라인 이모 차장님을 만났다. 

담배를 연거푸 피시면서 내게 황당한 말을 하셨다. 

‘최책임, 이제 일 좀 배워서 하려는데… 안됐다. 나야 15년 다녔지만… 좋은 시절 다 지난 것 같아.’

한숨을 푹푹 쉬시던 심각한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때가 메모리 반도체 치킨 게임의 초입이었다. 

2007년 하반기 부터 DRAM 시장에서 마이크론(미국), 키몬다(독일), 엘피다(일본), 프로모스(대만), 윈본드(대만)등의 업체와 삼성전자, 하이닉스가 피나는 출혈 경쟁을 시작했다. 당시 삼성전자의 주력 제품은 80나노 디램이었는데, 생산량을 Full로 가동하며 밀어 붙였다.


2007년 성과를 기반으로 한, 2008년 2월 지급된 PS는 기본연봉의 30% 정도가 지급되었다. (정확한 수치는 기억이 활실치..)

(나야 입사해서 1년도 안돼서 별로 한일도 없는데, 큰 돈을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근데, 2008년 초부터 회사는 초비상 상태가 되었다. 

2008년초 일부 12인치 라인에 웨이퍼 투입을 줄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급기야 특정 라인은 투입을 중단했다. 이게 뭘 의미하는 것인지 반도체에서 잔뼈가 굵으신 선배님들은 잘 아셨다. 


반도체 생산성비는 전자레인지처럼 껐다 켰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가동을 시작하면 정밀한 상태로 24시간 가동해야 한다.

라인에 (FAB) 웨이퍼를 한장도 투입을 안한다는 것은 제철소로 치면, 용광로를 끄는 것이다. 

생산회의에서 모 라인의 투입을 중지하기로 결정한 날. 그 회의에 들어 갔다 오신 부장님의 얼굴은 하얗게 변해있었다.

20년 회사생활 동안 이런 일이 처음이라고 하셨다. 설비에 드는 가동비용이라도 줄여야 한다며, 일부 설비들을 shut down 시키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 이라인 저라인 파견을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AMHS (Automatic Material Handling System)로 분주한 생산라인이 썰렁해진 모습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여러라인 Shift 여사원들을 10시 GY Shift 이전에 교육 하러 들어 갈 때도,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교육 내용과 무관하게 질문을 몇개 받았는데, ‘책임님 저희 라인 꺼요?’ , ‘정말 그렇게 안좋아요?’ …

내 수준에서 대답할 질문이 아니라서, 나도 모르는데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잘 될 겁니다.’라고 말하고 빨리 교육 내용으로 넘어갔었다. 


나 역시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인가 싶었다. 공사판이던 동탄 신도시에 전세를 겨우 얻어서 (당시에 다행히 싸서), 돈 많이 준다는 직장으로 이직을 했는데, 

20년 철옹성 잘나간다던 삼성전자 반도체 메모리사업부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진짜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까 싶었다.

웨이퍼는 투입하고 있지만, 라인 가동률이 바닥인 라인도 있었고. 엔지니어들 근무도 줄이도록 지시가 내려졌다. 


그러던 중, 당시 모라인 팀장이신 이모 상무님과 포토공정장이신 김모 부장님이 급히 부르셔서 뵐 일이 있었다. 

이분들 말씀은 듣던 중 황당했는데, 오히려 잘 됐다는 것이다. 

그동안 생산물량에 치여서 못 해봤던 것들을 다 해볼 기회가 왔다고 좋아하셨다. 

‘최박아. 이게 기회다. 너 하고 싶은대로 다 하게 해줄께… 뭐 부터 할래?’ (우리 이니 하고싶은 거 다해, 2008년 버전)

‘너 예전부터 뭐 해야 한다고 난리 치던 것들 있잖아. 그거 다 하자. 어차피 라인 논다.’


멍하니, 재수 없게 회사가 이렇게 넘어가나. 전세금 오르는데 보너스 안나오나 생각하다가… 이분들 말을 들으니 참신했다. 

이분들만 그런게 아니었다. 다른 몇몇 그룹장, 상무급. 그리고 그 위에, 위에. 당시 총괄 사장님까지. 

이참에 FAB 체질을 개선하자고 이내 분주해졌다. 

나는 당시에 방대한양의 반도체 생산 DB를 다 들여다 볼 수 있었는데. (초당 수백만 건의 transactio n이 일어난다.)

생소한 Device ID가 달린 EE lot (연구개발용 웨이퍼)이 라인에 무더기로 투입되는 것을 확인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당시 주력 공정인 80나노에서 60나노를 ramp up 초기까지만 걸치고. 50나노 mobile DRAM 개발로 점프한 것이었다. 

반도체 공정 노드가 바뀌면, 여러 설비들도 바뀌어야 한다. 특히 포토공정은 Stepper 종류가 바뀌어야하고. 

Etch, Wet, IMP, CMP 등등 설비 업그레이드가 필수이다. 이렇게 공정을 뚤어가는 일련을 작업을 (golden) o ne path 라고 하는데.  제품 세대를 뛰어 넘는 이런 작업이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이걸 어떻게 알았냐고?

라인 DB에서 설비별로 공정이 열리는 것을 계속 찍어 보고 있다가 안열린 공정을 찾아내고, 예측하는 일을 내가 했었다. 

내일은 이런이런 쪽에서 막힌다고 밤 늦게 리포트 쓰고, 전화하고.


그때 조모 과장님도 만났다. 일종의 감정 과잉인 상태의 분이었는데. (이제 임원 진급을 앞두고 계신 걸로 안다.)

이분은 나와 안면을 튼지 얼마 안돼서. 한밤중에 전화를 하셨다. 

‘야… 니가 병ㅅ 박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 하려면… 이런걸 해야겠어.' ㅎㅎㅎ

이 형님 덕에 재미난 일들이 참 많았다.


2008년 하반기가 됐을 때, 모라인 팀장님 술자리에 불려 나갔다가 들은 얘기는

‘이제 얼마 안남았다.’는 얘기였다. ‘걔네들 숨통이 거의 끊어졌다.’ , ‘6개월쯤만 지나면 된다.’

2008년 하반기에는 이미 생산현장이 많이 정보화 자동화 된 상태였다. 50나노 제품도 안정적으로 흐르고 있었고. 

40나노 준비가 한창이었다.

당시에 경쟁사들의 생산 DB 데이터의 일부가 넘어와서 분석한 적이 있었는데.

모든 지표에서 삼성전자가 월등히 앞서 있었다. 

(모듈별 TAT, Cycle Time , WPD (Wafer Per Day), Rework, Yield 지수등 다양한 수치를 비교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나간 2008년 한해 반도체를 주력으로한 부품 부분 실적은 -9000억원대 적자였다. 

반도체는 -14%의 영억이익을 기록한 것으로 기억한다. (대부분 해외 경쟁사들이 -40%를 찍던 시절이다.)

2009년 2월 2008년 실적에 기반한 PS가 2% 지급되었다. 통장에 뭐가 잠깐 왔다갔다는 말이 나왔던 시절이다. 

겉보기 실적은 최악이었지만, 실제로는 치고 올라갈 일만 남은 상태였다. 


2009년 초반에는 라인의 생산성을 나타내는 특정지수가 경쟁사 대비 50% 앞서 있다고 판단 되었다. 

이후에 40나노급 모바일 디램은 정말 노다지 같이 팔려나갔다. 생산성/수율은 회사 창립이래 신기록을 계속 경신했다.


당시에 초짜 책임급 엔지니어여서, 솔직히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지금보다도 알지 못하였다. 

주변 직원들의 얼굴에 드리운 공포심을 기억한다. 회사가 최악의 상황으로 달려갈 때. 

하지만, 지나고보니 기술을 아는 경영진이 내린 결정은 정말 너무나 과감한 것이었다. 

투자도 거침없이 했고, 포기할 건 포기하고 개발할 건 확실히 밀었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jaein.choi.94/posts/142310329108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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