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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사랑과 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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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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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22 2016/05/30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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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의 부모님은 이혼 직전까지 갈 정도로 다투셨다. 아버지는 당신의 어머니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몰랐으며 아내에게 자신이 원하는 모습만 투영하며 그것을 일방적으로 요구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아버지의 판타지에 맞춰 살 수밖에 없었다. 이 부부의 ‘사랑’은 바디우가 말한 ‘둘이 선 하나의 무대’가 아니라 아버지 한 명만 있는 독백의 무대였다.

이런 관계를 20년째 이어오며 끊임없이 다툼이 있던 어느 날 어머니가 선언했다. 아버지에게 당신은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그 문제를 고치지 못하는 한 나는 당신과 이혼할 것이라고 말이다. 이십년 동안 행복한 적이 없었으며 더 이상 이 관계를 사랑이라 할 수 없다고 말이다. 어머니 당신의 삶은 남편과 자식에 대한 사랑의 이름으로 ‘견딜 것’을 강요당하고, 견디지 못하면 사랑이 아니라고 비난받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목소리)만이 존재하던 무대 위에 어머니(의 우렁찬 목소리)가 올라온 것이다.

이 ‘청천벽력’ 같은 사태에 아버지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무대 위에 올라선 어머니를 마주 대할지 아니면 어머니를 비난하며 끌어내릴지를 말이다. 보통 다른 경우라면 어머니를 비난하고 폭력을 휘둘렀을 것이다. 당신이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말하거나 나는 당신을 사랑한 줄 아느냐고 말하며 어머니를 끌어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깨달았다. 어머니를 끌어내리는 순간 파탄나는 것은 이 무대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무대에 홀로 설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고, 어머니는 우선 병원치료를 받자고 말했다.

아버지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자신이 어떤 괴물이었는지를 처음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자신이 생각보다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그 우울증을 아내에게 떠넘기며 자신이 못하는 것을 전부 아내가 해주기를 바라며 자신의 이미지대로 움직이길 강요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 결과 자신의 부족을 아내의 문제로, 자신에 대한 불만을 아내의 잘못으로 전가시켰다는 것을 인정했다. 아버지는 폭력을 휘두른 것은 갑자기 불쑥 ‘파탄’을 선언한 아내가 아니라 자신이 지금까지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러왔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감사하게도 그 아내가 그 폭력을 이십년이나 견뎌왔다는 걸 깨달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이것을 인정하던 날 “아빠가 아빠 세대 남자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과제를 해냈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선언은 아버지에게는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괴물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면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하는 괴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괴물’이 된 어머니의 선언은 사실 아버지에게 구원의 메시지였다. 아버지가 자기 자신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기를 바랐던 꼭두각시로서의 아내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해야 하는 다른 존재인 ‘그녀’가 보였다. 아버지는 그날 죽었고 다시 태어났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지금은 주말마다 두 분만의 여행을 다니시며 카톡방에 닭살 돋는 이모티콘을 쓰면서 ‘사랑’을 나누고 계신다. 물론 이 과정이 한 번의 선언으로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었다. 어머니에게 과거는 ‘견디지 못하면 사랑이 아닌 것’이라며 사랑이 아닌 ‘견딜 것’만을 강요받았다면 이제는 사랑이기에 견딜 수 있는 것이 됐다. ‘견디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과 ‘사랑이기에 견딜 수 있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에로스의 재림은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단절에 대한 선언, 선언을 위한 무대 위로의 ‘난입’으로부터 탄생한다. 사랑의 이름으로 지속되던 일상적인 ‘폭력’을 청산할 것을 요구하며 아버지 홀로 존재하던 무대 위에 어머니가 난입한 ‘선언의 폭력’이 없이는 에로스의 재림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홀로 무대 위에 존재하며 무대를 지배하던 자는 그 무대 위에 ‘느닷없이 난입’한 자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한다. 난입을 통해서 비로소 무대 위에 둘이 서게 되는 것이며, 둘이 서는 것으로 사랑은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강남역 10번 출구가 바로 이 ‘난입’의 장소이다. 그곳은 이 사랑이 파탄 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사랑이라곤 희귀하던 이 나라에 이제야 사랑이 시작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이제야 비로소 한 무대 위에 두 개의 목소리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강남역 10번 출구를 대하는 당신의 태도가 곧 당신의 ‘사랑하는 이’를 마주하는 마음일 것이다.

이제 비로소 터져 나오는 그 목소리를 끌어내리는 순간 당신은 이 무대를 독점할 수는 있을지언정 영원히 사랑을 모르는 자로 외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엄기호 | 문화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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