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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 (6) 조회 : 2116
셀트소액주주 (115.143.***.172) 작성글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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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급 세자
2016/09/12 19:26
 



베드로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땐 항상은 아니겠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베드로의 음성에 실렸던 특별한 때가 있었습니다. 음성은 베드로의 음성이었지만, 능력은 하나님의 것으로 발산될 때 큰 변화가 나타난 겁니다. 그래서 이름을 불리운 아나니아가 주의 영을 시험하다가 죽기도 했고, 마술사 시몬이 두려워서 떨기도 했고, 애니아가 중풍병에서 일어났고, 죽었던 다비다가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또 다메섹의 제자인 아나니아가 “형제 사울아” 하고 이름을 부를 때, 역시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심으로 마음과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는 바울로 변신했죠. 


그 반면에, 행 26:24에선 베스도 총독이 "바울아!" 하고 부르면서 바울이 학문에 미친놈이라고 했지만 베스도가 부르는 이름엔 아무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총독이라는 세상과 육신의 권세를 행사했지만 바울에게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같은 인물인 바울을 부르는데 세상과 육신의 권세라고는 하나도 없는 아나니아가 부를 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세상과 육신의 권세를 휘두르는 베스도가 부를 땐 왜 아무런 변화가 없을까요? 그것은 형제로 부르는가, 아니면 미친놈으로 부르는가의 차이입니다. 바울을 형제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바울과 하나된 사람이며 역시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입니다. 육신의 야망과 세상의 권세에 도취되어 있는 베스도의 눈에는 바울이 미친 짓을 하는 것으로 보였을 겁니다. 베스도가 어찌 성령님을 알아서 바울을 형제로 부를 수 있냐고요!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 일부가 타락했다고 목소리 높여 떠들어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자기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의 이름을 자주 부릅니다. 하지만 이 목회자에게 이름을 불리운 교인들의 마음과 생활이 거의 변화되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헌금기도 할 때 십일조 헌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 감사헌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 무슨 특별 헌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을 죽 부르기도 합니다. 제직회, 당회를 할 때마다 이름들을 불러댑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불리운 사람들이 변하고 있나요? 오히려 서로 사랑하며 섬겨야 할 형제 자매끼리 싸움만 하지 않던가요? 중풍 병에서 일어나며,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며, 원수였던 사람이 형제로 변하며, 마음과 눈에 비늘이 덮여 있던 사람들에게서 비늘이 벗겨지나요? 매번 이름을 그렇게도 많이 불러대는데, 어째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나요? 슬픔과 고통에 잠겨있는 사람의 마음이 기쁨과 감사로 찬양하는 마음으로 왜 변하지 않나요? 왜 그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가 하면, 베스도와 같은 욕심과 야망으로 이름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라는 권위를 아무리 많이 행사해도 교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무능하며 철저하게 타락되어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요? 이렇게 말하면 신성 모독이 되는 걸까요? 내가 부르는 사람의 이름, 평상시에는 친구로 혹은 형제로 혹은 식구로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특별한 때에는 우리가 부르는 이름에 성령님의 무게와 책임이 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부르는 이름으로 상대방의 생각과 삶과 영이 변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책임을 동반하는 이름을 불러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나니아가 그랬으며 베드로가 그랬고, 빌립이 그랬으며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럴 때가 있어야 하지 않나요? 말로는 목사요 장로요 성도라고 하지만, 누군가의 이름을 간절히 불렀다면 변화를 일으키는 표적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표적을 가진 다음에 목사니 장로니 성도니 떠들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목사나 장로나 성도는 성령님과 관계가 있는 걸까요 없는 걸까요? 


마태복음 1장에는 누가 누구를 낳고 하는 족보의 기록이 주르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를 낳고, 낳고, 또 낳고... 이 기록은 예수님께서 바로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한 기록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탄생되었다는 기록이며, 아브라함의 많은 후손들이 혈통적인 자손을 낳았다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변화된 사람들을 기록하였습니다. 육신의 생각으로부터 영의 생각으로 변화된 사람, '마라의 쓴물'과 같은 율법으로부터 '주님의 십자가'에 의해 단물로 바뀌어진 말씀의 진리로 변화된 사람, 어두움의 권세로부터 빛 가운데로 나오는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이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의 족보를 쓴다면,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베드로와 120 성도를 낳고, 베드로는 고넬료를 낳고, 스데반은 아나니아와 함께 바울을 낳고, 빌립은 에디오피아의 내시를 낳고, 바울은 디모데를 낳고… 변화를 끼친 사람과 변화된 사람의 이름들은 모두가 다 형제요 자매입니다. 바울을 낳은 아나니아, 그는 바울을 형제로 맞이했는데 단순히 입으로만 형제라고 불러준 게 아닙니다. 형제란 서로 하나가 되었다는 고백이며, 하나가 되기 위해선 어느 한 쪽이 죽어야 성립되는 겁니다. 사울이 먼저 자신의 옛 사람을 죽임으로써 아나니아와 영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죠. 또한 사울뿐만 아니라 아나니아 쪽에서도 역시 뭔가의 행동을 취해야 사울과 하나가 되고 진정한 의미의 형제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아나니아가 바울을 낳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행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는 말씀은 성령님께서 사울이 감당해야 할 사역의 성격을 아나니아에게 미리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할 것이라는 말씀처럼, 과연 바울은 무지무지하게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아나니아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 아닐까요? 그럼, 아나니아가 바울을 낳기 위해서 그리고 형제가 된 사울에게 맡겨진 미래 사역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 아나니아가 감당해야 할 고난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요?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여 성령 충만함을 체험시킨 뒤 여러 날 동안 형제가 된 바울과 함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바울이 음식을 먹고 강건해지고 눈을 다시 떠서 제 정신을 차리는 모습을 지켜봤고, 즉시 바울이 움직여서 입을 열어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힘있게 증거하여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는 모습도 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공모하여 성문을 밤낮으로 지키고, 그래서 할 수 없이 바울을 광주리에 담아 다메섹에서 탈출시키면서 자기의 손으로 안수하여 변화를 시킨 바울의 운명을 자기 자신의 운명으로 보았을 겁니다. 이 사건 이후에 사도 바울과 아나니아가 다시 만나서 재회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나바, 누가, 마가와 함께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아나니아와 회포를 풀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로마서 16장과 빌립보서 4장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친구들과 동역자들과 보호자들의 명단에도 아나니아의 이름은 없습니다. 다메섹으로 들어올 때는 소경으로 들어왔다가 나갈 때는 광주리를 타고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가야 하는 사도 바울의 묘한 다메섹과의 인연... 아나니아가 바울과 작별할 때,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받고 죽기까지 해야 하는 고난의 길을 함께 갈 것을 눈물과 기쁨으로 다짐하면서 광주리에 담아 내려보낸 게 아닐까요? 


밤낮으로 성문을 지키던 유대인들은 바울이 감쪽같이 성을 탈출한 사실을 알고 어떻게 했을까요? 유대인들이 조용히 그것을 받아들이고 꾹 참았을까요?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틀림없이 그 못된 성질을 누군가를 대상으로 화풀이했을 겁니다. 변화되기 전의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초대 성도들을 핍박했던 것처럼, 다메섹의 유대인들은 굶주린 사자처럼 살기(殺氣)를 내뿜으면서 다메섹이라는 도시 전체에서 피의 보복를 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가정하면, 광주리에 함께 타지 않은 아나니아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나니아는 어차피 살기등등한 사울에게 체포되거나 죽었을 몸이지만, 그 사울을 형제로 맞이한 후에는 또 다른 이빨을 들어낸 사자와 같은 유대인들에게 갈기갈기 찢기지 않았을까요? 주님 안에서 '형제'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겁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형제의 의미이며, 사울을 살려 보내기 위하여 아나니아가 감당해야 할 고난이며, 형제의 표적입니다. 이것이 형제 바울을 낳으면서 자신은 죽어야 하는 아나니아의 표적입니다. 사울에게 "형제 사울아" 하고 부른 아나니아의 간절함 음성... 칼과 창이 번뜩이고 비명으로 가득한 다메섹을 뒤로 하고 달아나야 하는 바울의 가슴속에 메아리가 되어 오래 오래 새겨졌을 것 같네요.






  • 셀사랑 홈페이지 이동하기 (49.175.***.148) 09.23 00:21
    8 7

    글을 읽으면서 자신을 많이 돌아보면서 읽다보니
    마지막부분 세줄의 글이 가슴을 뭉클하게 하네요.
    (사울에게 "형제 사울아" 하고 부른 아나니아의 간절함 음성... 칼과 창이 번뜩이고 비명으로 가득한 다메섹을 뒤로 하고 달아나야 하는 바울의 가슴속에 메아리가 되어 오래 오래 새겨졌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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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셀사랑 홈페이지 이동하기 (49.175.***.148) 09.23 00:21
    8 8

    셀소주님 항상 고맙습니다.
    환절기 감기조심하세요..늘 강건하시길 항상 기도하겠습니다.^^
    댓글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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