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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세 여행자 이기지의 글은 조회 : 1326
gregory16 (49.1.***.59) 작성글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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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0 01:02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출장자는 돌아와 보고서와 여행기를 남긴다. 조선은 엄격한 국경 통제 국가로 해외는 중국 아니면 일본이었다. 에도시대에 일본에 보낸 통신사는 '쇄환사'를 포함해도 12회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중국이 전부였다.

통계마다 조금 차이가 있지만, 조선 500년 동안 명나라와 청나라 출장은 약 800회로 추정한다. 명나라 때는 '조천사(朝天使)', 청나라 때는 연행사(燕行使)라 불렀으며 부경사(赴京使)라는 표현도 보인다. 귀국 후 상정문(上程文)이라는 보고서를 국왕에게 올렸다.

반면 중국을 다녀와 남긴 일기나 여행기 등 사적인 기록은 연행록(燕行錄)이라 부른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연행록은 100편 정도. 개별 여행기를 읽을 때와 달리 다양한 연행록을 계속 읽다 보면 싫증 나기 쉽다. 여정이나 숙소, 관광 지역이 비슷한 데다 여행지에서 인용하는 글까지 천편일률적이라는 인상도 받는다. 일부 연행록은 이전 출장자의 기록을 날짜와 날씨만 고쳐서 쓴 경우까지 있다. 현대인들의 출장보고서 베끼기의 원조라고 할까?

예외적으로 박지원, 홍대용, 김창업의 여행기는 조선시대 3대 연행록이라 하는데, 나는 리더들에게 이기지의 '일암연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스케일과 디테일 양면에서 다른 여행기들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궁벽한 나라에서 옹색하게 지내는 것을 싫어했던 그는 강희제가 통치하던 1720년에 중국을 방문한 300년 전의 여행자다. 정해진 숙소 밖으로 외출을 금하는 문금(門禁) 조치와 청나라 갑군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구차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식수를 구해 온다는 명목으로 거의 매일 외출을 시도했다. 대로뿐 아니라 호동(胡同·후퉁)이라 부르는 북경 골목길을 둘러보며 일상의 삶을 관찰하던 골목길 여행자였다.

남당, 동당, 북당 등 북경 천주당을 일곱 번 방문하고 세 차례 답방을 받았다. 포르투갈, 독일, 벨기에 등 다국적 선교사들은 종교만이 아니라 천문학과 과학, 기술, 예술에 뛰어나서 서양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좋은 창구였다. 서양역법과 수학을 주제로 담론을 나눈 뒤 "만고의 비루함을 씻게 되었다"며 감격해하는 장면은 학술모임을 의미하는 콜로키움을 연상케 한다. 소통의 매개체는 포도주였다.

"포도주 석 잔을 내왔는데 지난번에 마신 것보다 맛이 더 좋았다. 나는 연거푸 두 잔을 마셨을 뿐인데도 많이 취하였다. 입에 들어갈 때는 상쾌하고 목으로 넘어갈 때는 부드러워 그 맛을 형언할 수 없었다. 선인(仙人)의 음료라 하더라도 이보다 낫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에서 와인을 마시고 시음기와 레시피를 남긴 첫 주인공이며 카스텔라와 에그타르트로 추정되는 서양떡도 즐겼다. 포크로 여겨지는 서양 차도(叉刀), 세계지도, 서양화, 자명종을 선물받고 시루떡, 조선종이, 청심환 등으로 답례하는 등 일상의 역사와 동서양 문화 교류라는 관점에서도 흥미진진하다.

그는 정사였던 부친 이이명을 수행한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북경에 갈 수 있었다. 정사와 부사, 서장관은 자기비용으로 데려갈 수 있는 군관 수행원이 있었는데, 무인과 함께 유능한 자제나 친척을 일부 선발해 해외 견문 기회를 줬다. 박지원과 홍대용이 북경에 다녀온 것도 자제군관 자격이었다.

31세 여행자 이기지의 글은 지적인 호기심과 모험으로 가득하고, 문장 사이에 호마(胡馬)가 뛰노는 것처럼 힘찬 기운이 약동한다. 세종대왕의 후손답게 융합 사고의 소유자였고, 서포 김만중의 외손자답게 글솜씨가 뛰어났다. 조선을 객관화해 타자(他者)로 인식했으니, 북벌에서 북학으로의 극적인 인식 전환이었다. 이기지의 포도주와 카스텔라에 영감을 받아 많은 조선의 지식인들은 북경으로 향했다. 그중의 한 명이 연암 박지원이다. 스티브 잡스는 혁신이 리더와 추종자를 구분 짓는다고 했던가? 이기지는 18세기 후반 조선에 실학이라는 이름의 그랜드투어 바람을 일으킨 진정한 혁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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