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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무늬 대꼬바리에 담긴 애국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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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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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69 2020/07/15 09:02
수정 2020/07/1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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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무늬 대꼬바리에 담긴 애국심

 

  담배가 17세기 초에 일본에서 도입되면서 사람들이 즐겨 피우게 되었다. 담배는 인체에 해로운 물질이라 알려졌지만, 건강을 위해 피우는 버릇을 끊기도 어렵다. 화투 놀이 취미처럼 한 번 빠져들면 끊고 나오기가 어렵다. 요즘 스마트폰에 매달리는 마음이나 흡사한 기호성을 지닌 담배 태우는 버릇이다. 담배를 태우는 기구가 장죽의 담뱃대라고 부른다. 담뱃대의 담배를 태우는 부분은 대꼬바리라 한다. 대꼬바리는 열에 견디는 구리나 놋쇠 백동 등으로 만든다. 일반에 널리 사용되는 것은 구리가 많이 든 합금의 놋쇠가 많다. 조선 말에는 귀족들 사치품의 대상으로 호화로운 대접을 받는 액세서리다.

  내가 아는 담뱃대는 어릴 때 할머니들이 눈병을 고치는 데는 대꼬바리를 사용한다. 특히 눈에 다래끼가 생기면 금방 담배 피운 뜨거운 대꼬바리를 수건에 여러 겹 감싸서 눈을 지진다. 대꼬바리가 식으면 한 겹씩 수건을 벗겨가며 다스린다. 대꼬바리는 구리의 성분이 열을 간직하는 보온효과가 가장 크기 때문에 그 효과의 유용한 이용이다. 견딜만하도록 따끔하게 다름질하는 치료 방법이다. 어느 정도 대꼬바리 높은 열기로 세균을 죽이는 방법이 탁월하다. 희한하게도 이 방법이 재발 없는 치료로 완치율이 높다. 필자도 어릴 때 이런 방법의 치료 효과를 느끼며 자란 일이 생각난다. 담배는 비록 해롭다고 해도 대꼬바리의 새균 소독 치료 방법은 아주 훌륭했다.

  대꼬바리로 다래끼 눈병을 치료하면서 신기한 마음으로 대꼬바리의 모양을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런데 대꼬바리에는 상표처럼 태극 무늬가 선명히 새겨져 있다. 일본강점기 단말마적으로 우리 민족 말살 정책에 혈안이던 총독부의 감시도 이를 발견하지 못한 일이 통쾌한 관심사다. 동아일보가 손기정 마라톤 선수 가슴의 일장기 말살 이유로 동아일보는 정간처분을 받았다. 이 사진과 기사를 쓴 이길용 기자는 동아일보 간부들과 함께 총독부에 끌려가 죽을 곤욕을 치렀다. 나중에 이길용 기자가 피범벅이 된 옷을 부인이 사진에 담아 남겼다.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에 올렸다는 애국심이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올림픽 세계기록을 세운 손기정 선수는 한국인이었지만, 일본국민이라는 홍보로 세계에 일본 자랑의 대상이었던 일이다.

  이런 시대적인 아픈 경황에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대꼬바리에 태극무늬를 남기는 용기는 대단한 일이다. 당시 담배를 피우는 즉 대꼬바리를 이용하는 인구는 대다수 국민들이다. 네덜란드 하멜(1630~1692)이 쓴 하멜표류기에 따르면 조선에서는 아이들도 담배를 피웠다고 했을 정도로 담뱃대는 국민 애용품이었다. 오늘의 흥행으로 치면 전 국민의 눈에 희망을 넘치게 하는 최고의 PR 광고 기능 활용의 기회였다. 지금 커피를 마시는 인구가 많은 듯 담뱃대 이용 국민이 그 정도였다. 당시 담뱃대가 사치풍조의 최대 기호성으로 등장한 일이다. 왜놈 총독부대원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우리 민족만 서로 마음 다짐 효과를 적극적으로 불러일으켰다. 매일 시도 때도 없이 매만지며 사용하는 담뱃대에 태극기는 건재하다는 자부심을 국민들 마음에 새기는 일이다. 이런 애국심의 발로야말로 우리 겨레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총독부 검열관들은 담뱃대 대꼬바리에 은으로 새겨넣은 멋진 태극 무늬를 그저 올챙이 두 마리 정도로 알았을 일이다. 자세히 보면 올챙이 두 마리가 서로 정답게 보듬고 있는 아름다운 모양이다. 만약에 총독부 감시의 눈이 알게 되었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또 화를 당했을 일이다. 결과적으로 일제에 발각되지 않은 일로 역사에 남을 우수한 사례라 하겠다. 이런 내용의 글을 아직 필자가 접하지 못하여 필자의 지식이 과소한 원인으로 느껴져 인터넷 검색으로 찾게 되었다. 대꼬바리 만드는 장인 공이 애국심이 남달라서 새겨 넣은 듯하다. 주인 사장에게 화가 미칠까 노심초사하여 아무도 모르게 자기만 알고 만든 창작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찾아낸 곳에 담뱃대는 대일무역의 창구 구실을 하였던 동래(東萊)에서 일찍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명성을 굳혔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의 '오주연문장전산고'나 '규합총서'에서 동래연죽을 유명물산의 하나로 지목하였고, <춘향전>에서도 “왜간죽 부산대에 담배를 너훌지게 담는다.”는 구절이 보인다. 1920.5.27 동래연죽공 400여 명이 임금 30% 삭감에 항의 시위 기록도 있어 담뱃대 공장의 규모도 느껴진다. 여러 문헌을 찾아 헤매었으나 정확한 창작자의 의도가 분명한 글은 찾지 못했다. 가보처럼 간직한 대꼬바리를 생각하며 아쉬운 역사의 근원을 생각한다. 담뱃대 제작의 근원지는 아마도 동래지역이라 여겨진다. 조선 말엽 당시 담뱃대 생산이 동래산이 명품으로 특별했다. 담바귀타령도 동래와 울산지역을 노래하고 있는 애창의 일이다.
(글 : 박용 20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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