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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숙 칼럼] 푸틴은 어떻게 세계를 속였나
파이낸셜뉴스 | 2020-07-05 16:11:06
KGB 중령출신 무명에서
36년 통치 '차르'로 등극
가짜 민주주의 경계해야


블라디미르 푸틴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어중간한 시공무원에서 최고권좌에 오른 과정은 극적이다. 1990년대 말 막판 병약해진 보리스 옐친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이 그들 안위를 위해 급히 스카우트한 국가보안위원회(KGB) 중령 출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초반 2%대 지지율에 불과했지만, 그후 정교하게 터져나온 체첸분쟁이 이 무명의 정치인을 대통령 자리까지 올려놓는 마법을 부린다.

1999년 9월 체첸인의 폭탄 공격은 그 어떤 증거도 확인되지 않았으나 푸틴은 완벽히 진압을 수행했다. 동유럽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 예일대 교수는 이를 두고 "정치적 소설을 쓴 잉크의 정체는 피였다"고 표현했다. 그는 푸틴 권력을 해부한 책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THE ROAD TO UNFREEDOM)'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는 선거를 거쳐 권력이 바뀐 경우가 전무하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러시아에 뿌리 내린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기존 대통령 재임기간 백지화 내용을 담은 러시아 헌법개정안 국민투표가 1일(현지시간) 통과되면 푸틴은 앞으로 2036년까지 집권할 수 있다. 4년 뒤 임기만료 후에도 12년을 연임, 통틀어 36년간 최고권력 지위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현대 비슷한 경제규모의 국가에서 이 같은 권력자를 본 적 있는가. 러시아는 어쩌다 느닷없이 등장한 푸틴과 한몸이 됐나.

푸틴의 정치는 옐친 측근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은 러시아 왕정주의자 이반 일린의 사상부터 낯설다. 일린은 푸틴이 재발견해내지 않았더라면 21세기 전혀 소환될 일 없는 헤겔 우파 출신의 반공산주의자다. 10월 혁명을 역사상 가장 끔찍한 재앙이라 부르짖었던 그는 결국 추방돼 스위스에서 1954년 사망했다.

잊혀진 사상가는 새로운 통합 정신을 찾던 푸틴에 의해 부활을 맞는데, 핵심은 러시아의 순결이다. '허약하고 손상된 자존감'으로 혁명의 비극에 빠져들었지만 러시아 민족의 본질은 '자연과 영혼의 유기체'라는 게 그의 사상이다. 혁명은 쇠퇴기에 접어든 서구가 순결한 러시아에 가한 형벌로 이를 극복할 힘은 신앙에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러시아를 어떤 대가를 치르고도 지켜야 하는 신의 모국이라고 설파했다. 푸틴은 이를 기반으로 기독교 전체주의 뼈대를 만들어낸다. 국민 75%가 정교회 신자인 나라에서 푸틴은 신성한 대속의 사명을 자신에게 부여했다는 게 러시아 전문가들 분석이다.

서구로부터 러시아를 지켜내고 제국으로 가기 위한 길에 푸틴이 집착한 전략은 상대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영국의 브렉시트, 유럽에 창궐한 극우세력,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배후에 푸틴이 있었다고 스나이더 교수는 지적한다. "트럼프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짓밟으면서 미국을 무너뜨리진 못한다 해도 손상시킬 순 있다고 푸틴은 확신했을 것이다." 그는 "모스크바는 미국 국내정치를 네거티브섬 게임으로 전환하는 것을 도움으로써 국제정치에서 벌어지는 네거티브섬 게임에서 승리했다"고 정리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89년 '역사의 종말'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불가역적인 최종 승리자로 선언했지만, 30년 지난 현실은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 가면을 쓴 권위주의, 가짜민주주의는 남의 나라만의 문제도 아니다. 스나이더 교수는 "새로운 형태의 도둑정치, 새로운 부자유를 직시하라"고 경고한다. 새겨봐야할 지적이다.

jins@fnnews.com 최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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