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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뜨거운 쇳물 옆에서 병든 피" 제강업 레들 작업 근로자 백혈병
프라임경제 | 2025-12-04 10:57:18
[프라임경제] 제철소의 제강공정은 언제나 뜨거운 쇳물과 함께 움직인다. 섭씨 1600도(℃)의 용강이 오가는 현장은 불빛이 번쩍이고, 쇳가루와 미세 분진이 공기 중을 가득 채운다.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고열과 분진 속에서 땀에 젖은 채 하루를 보낸다.

바로 그곳 레들(Ladle)이라 불리는 용기로 용강을 옮기고 정련하는 작업이 있다. 이곳은 제강공정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유해물질 노출이 심한 구역이다.

충청 지역 제강소에서 15년 동안 레들 작업을 담당하던 A씨(48세)는 평소 특별한 질병 없이 근무하던 중 이유 없는 피로감과 잦은 어지럼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과로라고 생각했지만, 건강검진 결과 백혈구 수치가 급격히 낮게 나타나 결국 급성골수성백혈병(AML) 진단을 받았다.

이후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그에게 가장 큰 고민은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렸을까"였다. 가족들조차 "혹시 유전인가, 생활습관 때문인가" 하며 답답해했다.

하지만 A씨가 근무한 레들 작업장은 용강을 정련하는 과정에서 벤젠과 톨루엔 등 유기용제계 화합물, 그리고 망간·니켈·납·크롬 등 중금속 분진이 다량 발생하는 곳이었다.

또한 탈황제와 탈산제를 투입하는 순간에는 자극적인 연기가 발생했고, 환기시설은 노후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방진마스크도 지급 받았지만, 실내 온도가 50도(℃)를 넘는 작업장에서 착용하기 어려웠다.

A씨는 치료 도중 노무사를 찾아 상담을 받았고, 백혈병이 업무상 질병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노무사는 △작업환경측정 결과 △환경안전보고서 △동료 진술서를 확보하며 산재 신청을 준비했다.

그러나 회사 측은 "유해물질이 검출되지 않았다"며 부정했다. 공단 초기 조사에서도 "직접적 노출 근거 부족"을 이유로 불승인 결정을 내렸다.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A씨와 가족은 재심을 청구했다. 3년 전 측정된 벤젠 검출 자료가 노무사를 통해 발견, 당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진술도 모였다.

또 A씨가 담당했던 레들 작업 구간은 공정상 벤젠계 물질이 사용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점이 밝혀졌다. 결국 근로복지공단은 A씨의 급성백혈병을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했다.

이 사건은 제강업 현장의 보이지 않는 위험을 드러낸 사례다. 고열과 중금속, 유기용제 등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체내에 쌓여 수년 후 백혈병이나 골수이형성증후군 같은 혈액암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제강업체는 여전히 작업환경 측정을 형식적으로 진행하고, 실제 유해가스가 발생하는 시점에는 측정을 피하는 경우도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사업주에게 정기적인 작업환경 측정과 근로자 특수건강진단을 의무화하고 있다. 하지만 측정 자체가 부실하거나, 용역업체가 형식적으로 서류를 남기는 경우라면 제도의 실효성은 사라진다. 결국 근로자는 '노출된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노무사로서 과로·암·백혈병 사건을 맡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산재의 본질이 단순히 병의 원인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노동의 구조적 불평등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현장의 유해물질이 측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쇳물이 흐르는 그곳에서 보이지 않게 피가 병들고 있는 것이다.

A씨는 현재 치료를 마치고 요양 중이다. 그는 "산재 인정을 받은 것도 감사하지만, 나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의 바람은 단순하다. 제강업의 뜨거운 쇳물은 계속 흐르더라도, 그 옆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피는 더 이상 병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민희 노무법인 산재 노무사



이민희 노무법인 산재 노무사 cpla_mh@naver.com <저작권자(c)프라임경제(www.newsprime.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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