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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칼럼] 백수일기 #1. 매일 퇴사를 꿈꾸는 이들에게
프라임경제 | 2019-01-18 10:30:48
[프라임경제] 세상이 바뀌었다. 취업대란에 지방직공무원 경쟁률이 100대 1이 넘고,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마저 면접보고 들어가는 시대다. 대통령이 집무실에 '일자리상황판'까지 걸어두고 직접 챙기겠다며 공언했지만 아뿔싸, 아차 하는 사이 나도 그만 백수가 되고 말았다.

스스로 이 꼴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특히 아들 자랑을 취미로 삼으시던 부모님의 놀라움은 훨씬 컸다. '너희 아들, 그 뭐시냐. 외국에서 공무원 한다며? 근데 왜 여기 있냐? 어제 후줄근한 추리닝 입고 동네 돌아다니던데?' 라는 소리 듣기 싫어 요즘 우리 부모님, 두문불출하신다.

◆82년생 남자의 비극

1982년생인 나는 지금껏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산업도시인 울산에서 태어나 미세먼지와 공해를 친구삼아 놀았다. 밖에서 놀다 기침이 터져 나와도, 집에 들어오면 옷이 시커멓게 변해도 너무 열심히 논 내 탓인 줄 알았다. 엄마가 내 탓이라고 했으니까.

고등학교 때 IMF 사태가 터졌다. 금을 내놓아야 나라가, 경제가 산다고 했다. 해외여행이나 다니고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국민이 원흉이라고 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탓했다. 신문이고 방송이고 다 국민 탓이라고 했으니까. 당시 여권도 없었고 멀리 떠나본 곳이라고는 버스 타고 수학여행 가본 게 전부였다. 샴페인은 폭죽 같은 건 줄 알았다.

어느 날 "엄마 우리는 금 좀 없어요? 나도 나라에 금 좀 갖다 주게 주세요"했더니 "금? 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다음 달 생활비가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는데"라는 타박이 돌아왔다. 길게 줄을 서가며 금붙이를 내놓는 어린이들을 보며 우울해졌다. 금붙이 하나 없는 나 같은 청소년 때문에 곧 나라가 망할 것만 같았다.

외환위기 사태가 전국을 휩쓸던 그때 정치인과 기업인, 언론들까지 싸잡아 IMF(국제통화기금)를 욕하고 흥청망청 놀아난 국민을 탓했다. 나를 포함한 평범한 사람들 대다수는 IMF가 뭐하는 기관인지, 경제가 무엇인지 잘 몰랐던 탓에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살면서 여러 부류의 인간들을 만나다 보니 깨달은 게 하나 있었다. 뒤가 켕기는 녀석들은 항상 앞장서서 남부터 비난한다는 것.

이후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영어단어 책을 씹어 먹을 기세로 공부했고 신문사에서 인턴기자 생활도 했다. 술을 밥처럼 먹으며 기사를 썼으며 술의 힘을 빌려 틈틈이 학교 공부도 하고 취업준비도 했다. 취업준비는 하면 할수록 준비해야 할 게 더 많아졌다. 신문사 인턴으로는 부족해 공모전 준비도 해야 했고 영어 하나로는 부족해서 중국어, 일본어도 공부했다.

그래도 취직이 될지는 보장받을 수 없었다. 그 시절 잠자는 시간에도 영어라디오를 들었고 책을 읽으면서 밥을 먹었다. 대학만 가면 잔디에 앉아 기타치고 연애질할 수 있다는 건 다 거짓말이었다.

◆뉴질랜드 '철밥통' 걷어찬 자발적 백수

돈도 벌고 취업에 도움이 된다는 소리에 군대까지 시험을 치고 들어갔다. 복무기간이 1년6개월로 줄어든다고 다들 신나할 때 장장 3년6개월을 군대에 바쳤다.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로 못 한다. 군대에서 주경야독이라는 말을 철떡 같이 믿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했는데, 1년에 한 번 있는 외무고시시험만 보면 떨어졌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잘 안 되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라는 생각에 외국 공무원 시험을 봤는데 신기하게도 척척 다 붙었다. 한국은 경쟁이 너무 심해서 필리핀인이나 중국인에게는 수험기회조차도 주지 않지만, 아주 매정하지는 않은 게 외국이었다.

나는 양이 4000만 마리 살지만 사람 수는 400만밖에 안 된다는 뉴질랜드를 택했다. 영어도 서툴고 현지 세금체계는 더더욱 몰랐지만 뉴질랜드 국세청에 입부하자마자 세무교육 담당을 맡았다.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 4시간짜리 프레젠테이션을 대본처럼 달달 외우며 사장님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나이는 벌써 35살이었다.

그해는 이상했다. 직장 건물의 16층에서 한 사람이 자살을 했고 직장 동료 중 하나가 과로로 자기 책상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람의 평균연령은 70세 정도 된다는 신문기사가 내 눈앞에 있었다. 그때 갑자기 든 생각은 인생의 반은 남들이 시키는 것만 했으니 나머지 반은 내가 하고 싶은 것 좀 하고 살아도 되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팀장은 네가 떠나면 일주일에 세 번 잡힌 세무교육은 누가 하고 네가 관리하던 회계법인 52개는 또 누가 챙기느냐며 잡았다. 하지만 그날 그만두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남들이 시키는 것만 하고 살 것 같았다. 떠나는 날, 인수인계를 시켜줬음에도 후배는 궁금한 것이 생기면 물어도 되냐고 했다.

이제 저 멀리 다른 나라로 떠날 거라며 멋있게 거절했지만 후배는 끈질겼다. 인터넷으로 통하는 글로벌 사회라며 이메일로라도 물으면 안 되냐는 그에게 나는 "죽는다"며 을렀다.

'세상에서 제일 바쁜 게 백수'라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이제는 2주일마다 통장에 찍히던 급여도, 어디 가서 나를 소개할 명함도 아무것도 없다. 모아놓았던 돈으로 중국의 미래에 투자했지만 이 망할 나라가 미국이랑 티격태격하더니 중국펀드는 1년 새 반 토막이 나버렸다.

돈은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고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다행히 '일자리정부'를 내세운 현 정부가 창의적인 인재를 지원하겠다는 큰소리에 귀국을 서둘렀고 일자리지원사업에서부터 예술인 지원사업, 창업지원사업 등등 여러 가지 일들을 벌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한국에서 백수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82년생 한국남자의 생존기를 써 내려가려고 한다.

한성규 청년기자





*해당 칼럼은 사단법인 '청년과미래' 활동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한성규 청년기자 press@newsprime.co.kr <저작권자(c)프라임경제(www.newsprime.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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