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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터뷰]'39년 삼성맨'은 왜 중국기업으로 가게 됐나
한국경제 | 2020-06-12 08:50:49
지난 11일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가 술렁였다. 삼성전자 LCD(액정
표시장치) 패널 사업에 한 획을 그은 장원기 전 삼성전자 사장(사진·66
)이 중국 반도체 기업 '에스윈' 부회장(부총경리)으로 옮겼다는 소식
때문이다. 에스윈은 중국 1위 디스플레이업체 BOE를 일군 '중국 LCD 대부&
#39; 왕동성 전 회장이 일하고 있는 기업이다.

대부분의 기사엔 '40년 삼성맨 중국 반도체 기업行', '반도체 인력
·기술 유출 논란' 등의 제목이 달렸다. 장 전 사장을 원색적으로 비
난하는 댓글도 적지 않았다.

장 전 사장의 중국행(行) 소식을 듣고 '왜'란 생각이 들었다. 1981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S-LCD(삼성·소니 합작법인) 대표, LCD사업부장(사장
), 중국삼성 사장, 중국전략협력실장(사장) 등을 역임한 '39년 삼성맨'
;이 중국 업체를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장 전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한국에 있었다. "내 기사 댓글을 보고 속상해하는 가족들을 달래고 있었다
"고 했다. 장 전 사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본인의 선택에 대한 얘기를 들려
줬다.

기술 유출 우려에 대해선 "30년 전 삼성전자 반도체 '공정' 엔지
니어였고 10년 전 LCD사업부에서 나왔다"며 "유출할 기술이 없다&qu
ot;고 단언했다. 왕동성 전 BOE 회장이 '경영 지혜'를 나눠달라고 요청
했고 그와의 친분 때문에 수락한 것이란 얘기다. 장 전 사장은 "깊게 고민
하지 않았던 것은 후회하지만 한국과 삼성에 피해가는 일 없도록 할 것"이
라고 강조했다.



▶중국 기업 에스윈에 합류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왕동성 전 BOE 회장과의 인연 때문입니다."

▶어떤 인연입니까.
"중국삼성 사장으로 2012년부터 2017년까지 6년 간 근무했습니다. BOE에
삼성전기 콘덴서, 삼성SDI 편광판, 삼성전자 드라이버IC 등 삼성 제품을 팔았습
니다. BOE에서 만드는 소형 LCD 패널을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와 영상디스플레이
사업부(VD)사업부에 소개해줬습니다. 왕 회장이 상당히 고마워하더라고요. 이후
저한테 '따거'(큰 형)라고 부를 정도로 친분이 깊어졌습니다."

▶왕 회장이 에스윈 합류를 요청하던가요.
"2015년 왕 회장이 '회사 그만두면 뭐할거냐'고 묻더군요. '
삼성 자문하다가 놀겠다'고 답하니까 '같이 놀면서 사업하자'고 하
더라고요. 그래서 '난 삼성맨이고 한국에서 사업하면 삼성 선·후배
들과 다 연결이 되기 때문에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자금도 충분하지 않고
요. 그러니까 '잘됐다. 그러면 중국에서 함께 놀자'고 하더라고요. 그
리고 작년 왕 회장이 BOE에서 정년퇴직하자마자 '따거, 옛날 얘기한 거 기
억나. 회사 같이 하자'고 다시 요청했습니다."

▶중국 기업인데 부담스럽진 않으셨습니까.
"너무 가볍게 생각했는 지 모르겠지만, 왕 회장과의 의(義)를 생각했습니
다. 고심 끝에 수락할 땐 "난 삼성맨이고 삼성하고 경쟁되는 건 못한다&q
uot;고 먼저 얘기했습니다. 부회장(부총경리)라고 알려진 직함도 거부했는데,
억지로 단 것입니다."

▶한국기업에서 일하는 건 생각 안하셨습니까.
"전 삼성전자에서 39년 일했습니다. 삼성 선후배들이 한국 산업계 곳곳에
일하고 있습니다. 특정 한국 회사에 몸 담되면 일부 선후배만 도와주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담스러웠습니다."

▶에스윈은 어떤 회사입니까.
"먼저 사실관계부터 바로잡자면, 제가 일하게 된 곳은 반도체기업이 아닙
니다. '에스윈과기그룹'이란 지주회사 같은 곳의 부회장 겸 이사입니다
. 물론 계열사 중엔 '에스윈전산과기그룹'이란 반도체 팹리스(설계전문
기업)가 있습니다. 이 회사는 통신반도체, 디스플레이구동칩, AI(인공지능)칩
등을 설계합니다. 그리고 COF(칩온필름)라고, 디스플레이 조립할 때 쓰는 필름
을 만드는 계열사가 하나 더 있고, 나머지는 반도체 원료인 웨이퍼를 생산하는
곳입니다. 웨이퍼와 COF는 삼성도 필요로 하는 제품입니다. 삼성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죠."

▶'기술유출'이란 비난이 나오는데요.
"(한숨) 제가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에서 나온지 그만둔 지 30년 지났습니
다. 반도체사업부에서 일할 때도 반도체 건식식각 '공정' 엔지니어였습
니다. 제가 일했던 시절은 1M D램 시절입니다. 무슨 반도체 개발 기술이 있겠습
니까. 그리고 LCD사업부장 맡은 것도 10년 전 일입니다. 나이 66세 먹은 사람이
무슨 기술이 있어서 기술을 유출하겠습니까." (삼성전자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그는 과장 시절 반도체사업부에서 나와 LCD사업부로 옮겼다고 한다.
)

▶그러면 무슨 일을 하십니까.
"왕 회장이 '전략적인 큰 그림이나 좀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그
리고 그 회사에 들어간 제 돈도 없습니다. 한 달에 한 주 정도 중국에 머무르면
서 경영자문하는 역할입니다."

▶경영 노하우 전수네요.
"저같이 나이든 사람 머리 속엔 '지혜'가 있습니다. '기술&#
39;이 아닙니다. 지혜를 나누는 것까지 통제당하면, (한 숨)답답합니다. 우리가
안 가면 일본 사람이 가고 미국 사람이 (중국에)갑니다. 이미 '글로벌 원
월드(global one world)'인데…"

▶전직 삼성 사장이라서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만.
"전 아직 몸이 건강합니다. 40년 일하다가 2~3년 놀아보니까 사람 할 짓이
아니더라고요. 소일거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회의 있거나 일 있으면 가는겁니다
."

▶비난이 신경쓰이지는 않으신지요.
"1955년에 태어나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던 제가 삼성 사장까지 한 것에
대해 회사와 대한민국에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한국과 삼성에
반하는 행동을 하겠습니까. 만약 그런 상황이 오면 제가 먼저 (그런 요청을) 끊
겠습니다. 그 정도 안목이 없진 않습니다."

▶한국 은퇴자들을 중국기업들이 '모셔가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
니까.
"모셔간 사람 없습니다. 중국은 1년에 대졸 이상 학력자가 780만명이 나옵
니다. 그 중에 석박사가 80만명이 나온다. 우리 대졸자 70만명보다 많습니다.
중국에서 LCD를 처음 시작해서 지금까지 일해온 인력이 4000명 넘습니다. 한국
기술 인력에 대한 수요가 크지 않습니다."

▶한국 LCD가 중국업체에 밀리는 상황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가슴아픕니다. 개인적으론 중국 업체에 진 게 아니라 한국 기업들의 
9;전략적 실패' 영향이 큽니다. 2011년에 한국기업들이 11세대 LCD 투자했
으면 중국 업체들이 못 따라왔을 겁니다."

통화 내내 장 전 사장은 '39년을 몸 담았던 삼성에 부담을 주는 게 아닌 지
'에 대해 걱정했다. 삼성전자의 현직 임원은 장 전 사장에 대해 "LCD
사업부장 시절인 2010년 사내 블로그를 직접 운영하며 후배들과 활발하게 소통
했던 게 기억난다"며 "후배 결혼식 주례를 설 정도로 회사와 직원들
을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장 전 사장이 블로그에 올린 LCD 사업
관련 글들은 '삼성 LCD 역사 교과서'로 불릴 정도로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계속 일하고 싶은 의지'와 '곱지 않은 시선' 사이에서 장 전
사장의 고민은 깊어 보였다. 그는 인터뷰 마지막에 "일하고 싶은 마음,
왕 회장과의 '의리' 때문에 중국 일을 시작하기로 했는데, 일이 커져서
답답하고 가슴아프다"고 토로했다. 이번 일에 대해선 "내 평생에 제
일 어려운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한국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와 맞물린 중국의 산업 굴기(]起). 경험 많은 한
국 고위 경영자들을 원하는 중국 등 외국 기업들의 수요는 계속 커질 것으로 예
상된다. 산업계에선 현장에서 은퇴를 시작한 50~60대 한국 대기업 임원들이 장
전 사장과 같은 상황에 직면하는 사례가 계속 나올 수도 있다.
한국이 장 전 사장 같은 산업계의 자산을 끌어안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
는지에 대한 의문과 경험 많은 은퇴자들이 과도하게 오랜 기간 손발이 묶인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 LCD 사업을 개척했던 장 전 사장이 은퇴자들의 '인생
2막'과 관련해 어떤 이정표를 남길 수 있을지 기대된다.

<장원기 전 삼성전자 사장 약력>
△대구 출생(1955년) △경북고 졸업(1974년) △연세대 화학공학과 졸업(1981년
) △삼성전자 입사(1981년) △S-LCD 대표이사(2004년) △삼성전자 LCD사업부장
(2008년) △중국삼성 사장(2012년)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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