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시간 속보창 보기
  • 검색 전체 종목 검색

뉴스속보

[윤중로] 세기의 결혼식
파이낸셜뉴스 | 2018-05-21 18:17:05
영국 런던을 처음 간 게 13년 전이었던 거 같다. 유럽에 1년 체류할 기회가 있었는데, 목적지에 앞서 1주일 경유지로 잡았던 곳이 런던이다. 남편과 나는 각각 거대한 검은색 이민가방을 하나씩 들고 히스로공항에 도착했다. 7월 중순 섭씨 40도가 웃도는 무더운 날이었다.

숙소는 런던 서북부 부촌에 위치한 가성비 높은 아담한 호텔. 우리는 호기롭게 그곳까지 지하철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이라면 그 붐비는 공항에서 듣도 보도 못한 길이름 위의 호텔까지 그 같은 이동경로를 상상하지 못하겠지만, 그때만 해도 즐길 만하다 생각했던 것 같다.

이윽고 낡을 대로 낡은 지하철 통로, 미로 같은 터널을 헤쳐 승강장으로 향하는 계단 한복판에 서서 나는 무모했던 결정에 땅을 치고 후회했다.

그런데 그 순간, 이 미련해 보이는 가방을 대신 들어주겠다고 나선 금발의 젊은이가 나타났으니 놀라운 영국인 체험은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는 가방을 번쩍 들어 헉헉대고 있던 남편을 지나 승강장 바닥에 가뿐히 내려놓고 환한 웃음으로 사라졌다. 숙소 앞 지하철까지 여러번 고비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이런 영국인의 출현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드디어 지하철을 빠져나왔고, 이제 고생은 끝이려니 했다. 하지만 웬걸. 온통 비슷하게 생긴 집들 사이에서 호텔을 찾을 수가 없었다. 스마트폰 문명이 아직 개화하지 않았던 시대, 그저 이민가방을 움켜쥔 채 론리플래닛 책 속 지도만 뚫어져라 보고 있던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준 이는 근사한 노부부였다. "메이 아이 헬프 유?(May I help you?)" 그들은 우리 힘으론 절대 찾지 못했을 그 숙소까지 직접 길안내를 해줬다.

가끔 사석에서 이런 경험담을 들려주면 반응은 천차만별이었다. 그중엔 정반대 지독한 영국 체험담을 꺼낸 이들도 있었다. 그러니 나는 좋은 기억을 갖게 해준 그들에게 그저 감사할밖에.

지난 주말 세계인의 눈은 다시 영국으로 쏠렸다. 영국 왕위 계승서열 6위 왕자와 흑인 혼혈 돌싱녀 미국 할리우드 여배우의 동화 같은 러브스토리, 그 파격적인 세기의 결혼식에 전 세계 사람들이 눈을 떼지 못했다. 예식이 치러진 윈저성 세인트 조지교회에서 가장 긴장한 듯한 이는 해리 왕자였다. 신부 메건 마클은 의연했고, 때로 비장감이 넘쳤다.
외신들이 영국 왕실의 오래된 관행에 대변혁이 불가피해졌다는 평을 쏟아낸 건 메건이 보여준 강한 의지력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의 공감대가 약자들의 권리, 인권이었다는 사실은 새삼 반갑다. 이들의 흔치 않은 동화가 어쨌든 해피엔딩이길. 영국 왕실에 예상되는 새로운 형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돌아돌아 우리땅에도 의미심장할 수 있지 않을까.

jins@fnnews.com 최진숙 국제부장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시각 주요뉴스
  • 한줄 의견이 없습니다.

한마디 쓰기현재 0 / 최대 1000byte (한글 500자, 영문 1000자)

등록

※ 광고, 음란성 게시물등 운영원칙에 위배되는 의견은 예고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