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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쉼을 꿈꾸던 자리는 무덤이 되었다
파이낸셜뉴스 | 2025-11-03 01:47:04
김예지 사회부 기자
김예지 사회부 기자

"생활 자체가 거의 먹고 자고 출근해서 일하는 게 전부였어요. 원래 몸무게가 80㎏ 가까이 나갔었는데, (쿠팡에서 일한 후로) 10㎏ 이상 급격히 줄면서 근육이 녹아내린다는 느낌으로 살이 빠지더라고요."

사랑하는 장남 덕준씨가 새벽 4시까지 물류센터를 뛰어다니다 급성심근경색으로 생을 마감한 지 5년. 모친 박미숙씨의 원통함은 여전했다. 그는 "골프를 4시간 쳐도 1만5000보는 걷는다"며 아들의 과중한 업무량을 부인하고 나섰던 쿠팡의 태도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제2·제3의 비극을 막고자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해도 회사는 눈앞의 불을 끄는 데만 급급했다.

같은 해 CJ대한통운 택배기사로 일하다 세상을 등진 김원종씨의 동생 효종씨도 형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일요일을 제외하면 하루 12시간씩 쉼 없이 뛰어다녔던 형은 10년 넘게 건강검진을 받아본 적도, 제대로 점심을 먹어본 적도 없었다. 집에 와서도 전표 정리를 이어갔다. 효종씨는 "근로자들은 눈치가 보여서 말도 못 하는 슬픈 현실"이라며 "고용주가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과로사는 반복된다"고 말했다.

유족들의 절규에도 현실은 가혹하다. 2021년부터 올해까지, 5년간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인한 산업재해 사망 승인건수는 총 1059건에 달한다. 그러나 6년(2020년~2025년 6월) 동안 근로복지공단의 뇌심혈관계 질병 유족급여 승인율은 평균 35.7%에 그쳤다. 통계의 바깥, 이름조차 남지 못한 이들이 얼마나 더 쓰러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는 구조다.

과로사 '증명'마저 유족들의 몫이다. 미숙씨는 '과로가 없었다'는 회사의 주장을 뒤집고자 200시간이 넘는 CCTV 영상을 직접 확인했다. 산재 신청에 필요한 자료조차 제공받지 못해 국회의원들의 도움을 받아 현장에 들어가야 했다. 'MZ핫플'로 꼽히는 런던베이글뮤지엄에서는 최근 20대 직원 정효원씨의 과로사 의혹이 제기됐다. 유족은 효원씨가 주 80시간 넘게 근무했다며 산재 신청을 한 상태지만, 사측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며 맞서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쉼의 권리조차 누리지 못한 채 스러지는 이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제도가 더디게 움직이는 사이 우리의 감시와 목소리가 멈춘다면 일터는 삶을 지탱하는 공간이 아닌, 갉아먹는 자리로 남을 뿐이다. 비극이 뉴스로 떠오를 때만이 아니라 매일, 꾸준히 구조를 바꾸는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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